오스카르 아리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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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카르 아리아스는 코스타리카의 정치인으로, 1986년부터 1990년, 2006년부터 2010년까지 두 차례 코스타리카 대통령을 역임했다. 1987년 중앙아메리카 평화 협정을 이끈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재임 기간 동안 코스타리카 경제를 비전통 농업과 관광 중심으로 변화시켰으며, 중앙아메리카 의회 창설을 추진했다. 2006년에는 중화민국(대만)과의 외교 관계를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전환했다. 퇴임 후에는 온두라스 헌법 위기 중재에 참여했으나, 성추문 의혹과 광산 개발 관련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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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르 아리아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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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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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오스카르 아리아스 산체스 |
로마자 표기 | Oscar Rafael de Jesús Arias Sánchez |
출생일 | 1940년 9월 13일 |
출생지 | 코스타리카 에레디아 |
정당 | 국민해방당 |
학력 | 보스턴 대학교 코스타리카 대학교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에식스 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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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 |
국립 계획 부처 장관 | 대통령: 다니엘 오두베르 임기: 1974년 – 1977년 전임: 본인 후임: 페르난도 숨바도 |
국립 계획 사무소 소장 | 대통령: 호세 피게레스 임기: 1971년 – 1974년 전임: 마르코 로페스 후임: 본인 |
코스타리카 입법 의회 대의원 | 임기 시작: 1978년 5월 1일 임기 종료: 1981년 5월 2일 전임: 호르헤 루이스 아르세 후임: 헤라르도 베가 선거구: 에레디아 (제2 선거구) |
코스타리카 대통령 | 제40대 임기 시작: 1986년 5월 8일 임기 종료: 1990년 5월 8일 부통령: 호르헤 마누엘 뎅고 오브레곤 (제1 부통령) 빅토리아 가론 데 도리안 (제2 부통령) 전임: 루이스 알베르토 몽헤 후임: 라파엘 앙헬 칼데론 |
코스타리카 대통령 | 제45대 임기 시작: 2006년 5월 8일 임기 종료: 2010년 5월 8일 부통령: 라우라 친치야 (제1 부통령) 케빈 카사스 (제2 부통령) 전임: 아벨 파체코 후임: 라우라 친치야 |
수상 | |
수상 내역 | 노벨 평화상 (1987년) 중앙아메리카 평화 노력 공헌 |
2. 생애
오스카르 아리아스는 에레디아주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3] 산호세에 있는 성 프란시스코 대학에서 중등 교육을 마쳤다.[3] 그는 보스턴대학교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하려 했으나, 곧 코스타리카대학교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1967년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정경대학교에 입학했다. 1974년 에식스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3] 하버드대학교, 프린스턴대학교, 다트머스대학교, 오벌린대학교, 워싱턴대학교 세인트루이스를 포함한 50개 이상의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아리아스는 카르타고 출신 노예 여성인 아나 카르도소(아나 카르도소)의 후손이다.[30]
아리아스는 코스타리카의 주요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국민해방당(PLN)에 입당했다. 1986년 그는 해당 당의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성공적으로 출마했다. 아리아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코스타리카 경제는 기존의 수출 작물(커피와 바나나)에 기반한 경제에서 비전통적인 농업(예: 외래 꽃과 과일)과 관광에 더 중점을 둔 경제로 변모했다. PLN 내 일각에서는 그의 행정부가 당의 사회민주주의 가르침을 버리고 신자유주의 경제 모델을 추진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명목상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당원이지만, 현재는 신자유주의자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4]
아리아스는 영국의 동료 존 비엘(John Biehl)과 로드리고 마드리가르 니에토(Rodrigo Madrigal Nieto)의 도움을 받아 에스키풀라스 II 협정 체결을 위한 노력으로 1987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는 격변의 시대 중앙아메리카 지협에서 민주주의와 평화를 증진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좌익 게릴라가 미국이 지원하는 엘살바도르와 과테말라 정부와 싸우고 있었고, 미국이 지원하는 콘트라(Contras)가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Sandinista)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으며, 군부로부터 정권을 막 탈환한 온두라스(Honduras)는 미군 기지로 이용되면서 곤경에 처해 있었고, 코스타리카의 다른 국경인 파나마(Panama)는 마누엘 노리에가(Manuel Noriega)의 군사 독재의 억압에 직면해 있었다. 아리아스의 지원으로 여러 무장 갈등은 10년 안에 종식되었다(과테말라 내전은 1996년에 최종적으로 종식됨).
그 후 아리아스는 중앙아메리카 지역의 더 높은 수준의 통합을 촉구하고 중앙아메리카 의회(Central American Parliament)(''Parlamento Centroamericano'')의 창설을 촉진했다. 현재 그의 행정부에서 아리아스는 코스타리카가 중앙아메리카 의회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아리아스는 또한 코스타리카의 교육 제도를 개정했다. 이와 관련된 가장 주목할 만한 조치는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과정의 말미에 표준화된 학업 능력 시험을 재도입한 것이다.
1986년 적극적인 영구 중립 및 비무장 선언을 발표한 오스카르 아리아스(Alberto Monge) 대통령의 뒤를 이어 국민해방당(PLN) 소속으로 대통령에 취임. 군대 폐지의 날(Día de la Abolición del Ejército, Military abolition day)을 선포(법안 #8115)
1990년 대통령직 사퇴.
1969년 코스타리카 헌법 개정으로 전직 대통령의 재선을 금지하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아리아스는 코스타리카 대법원 헌법재판소인 살라 4(Sala IV)에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으나, 2000년 9월 그의 신청은 기각되었다. 2003년 아리아스 지지자들은 재선을 금지하는 1969년 헌법 개정 조항에 대한 위헌 심판을 청구했고, 2003년 4월 재판부는 중복되지 않는 한 재선을 금지하는 조항을 무효화했다.[5] 이 결정은 전 대통령 루이스 알베르토 몽헤에 의해 "국가 쿠데타" 또는 "쿠데타"로 비난받았다.[6][7]
아리아스는 2004년 2006년 2월 총선에 다시 대통령으로 출마할 의사를 밝혔다. 당시 그는 투옥되거나 기소되거나 수사를 받고 있지 않은 유일한 생존 전직 대통령이었다. 수년 동안 민간 여론조사 기관과 여러 뉴스 매체에서 아리아스가 큰 차이로 승리할 것이라는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지만, 선거 초반에는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한 달 후인 3월 7일, 수동 재검표 후 공식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아리아스는 중도좌파 후보 오톤 솔리스를 18,169표(유효표의 1.2%) 차이로 누르고 1차 투표에서 대통령직을 차지하는 데 필요한 40%의 문턱을 간신히 넘었다. 그는 2006년 5월 8일 정오 국립경기장에서 취임 선서를 했다. 그는 2008년 9월 15일 연설에서 반대파의 비판으로 지쳐있다고 말했다.
2007년 6월 1일, 그는 코스타리카의 외교적 인정을 중화민국(대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전환하여 코스타리카를 그렇게 한 세계 167번째 국가로 만들었다. 이후 베이징의 외교적, 재정적 압력 하에, 그는 달라이 라마(동료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티베트에서 논란이 되는 폭동을 진압하는 베이징의 탄압 중에 예정되었던 방문을 무기한 연기하도록 유도했다.[8]
2009년 4월 18일,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열린 제5차 미주 정상회의에서 아리아스는 "우리는 잘못된 일을 해왔다"는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다른 라틴 아메리카 지도자들을 향해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지역과 비교한 개발 부족을 비난하고 실용주의와 군대보다 교육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할 것을 촉구했다.[9]
2009년, 온두라스 대법원은 온두라스 대통령 마누엘 셀라야가 헌법 및 법률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10][11] 이틀 후, 온두라스 국회(셀라야의 당이 128석 중 62석을 차지하여 다른 어떤 당보다 많은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셀라야의 해임을 결의했다.[12][13][14]
셀라야는 코스타리카로 망명했다. 온두라스 헌법에 따라 의회 의장인 로베르토 미첼레티가 대통령 계승 순위에 따라 임시 국가 원수가 되었다. 엘빈 에르네스토 산토스 부통령이 2008년 12월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해 사임했기 때문이다. 미첼레티의 임기는 2010년 1월 27일에 종료되었다.[15]
아리아스는 2009년 온두라스 헌법 위기에서 셀라야와 미첼레티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맡았다. 두 온두라스 대표는 여러 차례 아리아스와 만났지만 아직까지 어떤 합의에도 이르지 못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아리아스 자신은 처음에 코스타리카 헌법 재판소에 의해 헌법적 임기 제한으로 인해 추가 임기를 허용받지 못했지만, 온두라스와 달리 코스타리카 Sala IV 법원의 동의를 얻어 법적 수단을 통해 이를 뒤집었다. 온두라스에서는 2009년 11월 29일 새로운 선거가 계획되었다. 미첼레티 정부는 2009년 7월 2일 올해 대통령 선거를 앞당겨 치를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아리아스는 셀라야의 대통령 복귀를 촉구하는 7개 항의 합의안을 제시했다. 이는 임시 정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셀라야의 대표들은 아리아스의 제안을 "원칙적으로" 수용했지만, 미첼레티의 대표들은 셀라야의 온두라스 권력 복귀라는 핵심 사항에 반대했다.[16]
2009년 8월 11일, 아리아스는 2009년 신종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었다. 국가 원수로서는 처음이었다.[31] 2010년 5월 8일, 그의 임기는 만료되었다.
2007년 8월, 아리아스는 건염으로 고통받았고, 2008년 4월에는 요추 부위의 근육통으로 일부 활동을 취소했다. 2008년 5월에는 성대에 악성이 아닌 낭종이 있다는 진단을 받고 한 달 동안 말하지 말라는 권고를 받았다.[17] 2009년 8월 11일에는 신종플루(H1N1)에 감염되었지만 회복되었다.[18]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오스카르 아리아스는 에레디아주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3] 산호세에 있는 성 프란시스코 대학에서 중등 교육을 마쳤다.[3] 그는 보스턴대학교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하려 했으나, 곧 코스타리카대학교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1967년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정경대학교에 입학했다. 1974년 에식스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3] 하버드대학교, 프린스턴대학교, 다트머스대학교, 오벌린대학교, 워싱턴대학교 세인트루이스를 포함한 50개 이상의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2. 2. 정치 경력
아리아스는 코스타리카의 주요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국민해방당(PLN)에 입당했다. 1986년 그는 해당 당의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성공적으로 출마했다. 아리아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코스타리카 경제는 기존의 수출 작물(커피와 바나나)에 기반한 경제에서 비전통적인 농업(예: 외래 꽃과 과일)과 관광에 더 중점을 둔 경제로 변모했다. PLN 내 일각에서는 그의 행정부가 당의 사회민주주의 가르침을 버리고 신자유주의 경제 모델을 추진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명목상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당원이지만, 현재는 신자유주의자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4]
아리아스는 영국의 동료 존 비엘(John Biehl)과 로드리고 마드리가르 니에토(Rodrigo Madrigal Nieto)의 도움을 받아 에스키풀라스 II 협정 체결을 위한 노력으로 1987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는 격변의 시대 중앙아메리카 지협에서 민주주의와 평화를 증진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좌익 게릴라가 미국이 지원하는 엘살바도르와 과테말라 정부와 싸우고 있었고, 미국이 지원하는 콘트라(Contras)가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Sandinista)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으며, 군부로부터 정권을 막 탈환한 온두라스(Honduras)는 미군 기지로 이용되면서 곤경에 처해 있었고, 코스타리카의 다른 국경인 파나마(Panama)는 마누엘 노리에가(Manuel Noriega)의 군사 독재의 억압에 직면해 있었다. 아리아스의 지원으로 여러 무장 갈등은 10년 안에 종식되었다(과테말라 내전은 1996년에 최종적으로 종식됨).
그 후 아리아스는 중앙아메리카 지역의 더 높은 수준의 통합을 촉구하고 중앙아메리카 의회(Central American Parliament)(''Parlamento Centroamericano'')의 창설을 촉진했다. 현재 그의 행정부에서 아리아스는 코스타리카가 중앙아메리카 의회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아리아스는 또한 코스타리카의 교육 제도를 개정했다. 이와 관련된 가장 주목할 만한 조치는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과정의 말미에 표준화된 학업 능력 시험을 재도입한 것이다.
1986년 적극적인 영구 중립 및 비무장 선언을 발표한 오스카르 아리아스(Alberto Monge) 대통령의 뒤를 이어 국민해방당(PLN) 소속으로 대통령에 취임. 군대 폐지의 날(Día de la Abolición del Ejército, Military abolition day)을 선포(법안 #8115)
1987년, 중미 평화 협정 체결의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
1990년, 대통령직 사퇴.
1994년, 사재를 들여 재단을 설립.
1969년 코스타리카 헌법 개정으로 전직 대통령의 재선을 금지하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아리아스는 코스타리카 대법원 헌법재판소인 살라 4(Sala IV)에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으나, 2000년 9월 그의 신청은 기각되었다. 2003년 아리아스 지지자들은 재선을 금지하는 1969년 헌법 개정 조항에 대한 위헌 심판을 청구했고, 2003년 4월 재판부는 중복되지 않는 한 재선을 금지하는 조항을 무효화했다.[5] 이 결정은 전 대통령 루이스 알베르토 몽헤에 의해 "국가 쿠데타" 또는 "쿠데타"로 비난받았다.[6][7]
아리아스는 2004년 2006년 2월 총선에 다시 대통령으로 출마할 의사를 밝혔다. 당시 그는 투옥되거나 기소되거나 수사를 받고 있지 않은 유일한 생존 전직 대통령이었다. 수년 동안 민간 여론조사 기관과 여러 뉴스 매체에서 아리아스가 큰 차이로 승리할 것이라는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지만, 선거 초반에는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한 달 후인 3월 7일, 수동 재검표 후 공식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아리아스는 중도좌파 후보 오톤 솔리스를 18,169표(유효표의 1.2%) 차이로 누르고 1차 투표에서 대통령직을 차지하는 데 필요한 40%의 문턱을 간신히 넘었다. 그는 2006년 5월 8일 정오 국립경기장에서 취임 선서를 했다. 그는 2008년 9월 15일 연설에서 반대파의 비판으로 지쳐있다고 말했다.
2006년 2월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시민행동당(PAC)의 오톤 솔리스 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승리했다.
2006년 5월 8일, 대통령 취임
2007년 6월 1일, 그는 코스타리카의 외교적 인정을 중화민국(대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전환하여 코스타리카를 그렇게 한 세계 167번째 국가로 만들었다. 이후 베이징의 외교적, 재정적 압력 하에, 그는 달라이 라마(동료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티베트에서 논란이 되는 폭동을 진압하는 베이징의 탄압 중에 예정되었던 방문을 무기한 연기하도록 유도했다.[8]
2009년 4월 18일,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열린 제5차 미주 정상회의에서 아리아스는 "우리는 잘못된 일을 해왔다"는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다른 라틴 아메리카 지도자들을 향해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지역과 비교한 개발 부족을 비난하고 실용주의와 군대보다 교육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할 것을 촉구했다.[9]
2009년, 온두라스 대법원은 온두라스 대통령 마누엘 셀라야가 헌법 및 법률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10][11] 이틀 후, 온두라스 국회(셀라야의 당이 128석 중 62석을 차지하여 다른 어떤 당보다 많은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셀라야의 해임을 결의했다.[12][13][14]
셀라야는 코스타리카로 망명했다. 온두라스 헌법에 따라 의회 의장인 로베르토 미첼레티가 대통령 계승 순위에 따라 임시 국가 원수가 되었다. 엘빈 에르네스토 산토스 부통령이 2008년 12월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해 사임했기 때문이다. 미첼레티의 임기는 2010년 1월 27일에 종료되었다.[15]
아리아스는 2009년 온두라스 헌법 위기에서 셀라야와 미첼레티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맡았다. 두 온두라스 대표는 여러 차례 아리아스와 만났지만 아직까지 어떤 합의에도 이르지 못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아리아스 자신은 처음에 코스타리카 헌법 재판소에 의해 헌법적 임기 제한으로 인해 추가 임기를 허용받지 못했지만, 온두라스와 달리 코스타리카 Sala IV 법원의 동의를 얻어 법적 수단을 통해 이를 뒤집었다. 온두라스에서는 2009년 11월 29일 새로운 선거가 계획되었다. 미첼레티 정부는 2009년 7월 2일 올해 대통령 선거를 앞당겨 치를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아리아스는 셀라야의 대통령 복귀를 촉구하는 7개 항의 합의안을 제시했다. 이는 임시 정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셀라야의 대표들은 아리아스의 제안을 "원칙적으로" 수용했지만, 미첼레티의 대표들은 셀라야의 온두라스 권력 복귀라는 핵심 사항에 반대했다.[16]
2009년 8월 11일, 아리아스는 2009년 신종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었다. 국가 원수로서는 처음이었다.[31] 2010년 5월 8일, 그의 임기는 만료되었다.
2. 2. 1. 첫 번째 임기 (1986-1990)
아리아스는 코스타리카의 주요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국민해방당(PLN)에 입당했다. 1986년 그는 해당 당의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성공적으로 출마했다. 아리아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코스타리카 경제는 기존의 수출 작물(커피와 바나나)에 기반한 경제에서 비전통적인 농업(예: 외래 꽃과 과일)과 관광에 더 중점을 둔 경제로 변모했다. PLN 내 일각에서는 그의 행정부가 당의 사회민주주의 가르침을 버리고 신자유주의 경제 모델을 추진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명목상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당원이지만, 현재는 신자유주의자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4]
아리아스는 영국의 동료 존 비엘(John Biehl)과 로드리고 마드리가르 니에토(Rodrigo Madrigal Nieto)의 도움을 받아 에스키풀라스 II 협정 체결을 위한 노력으로 1987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는 격변의 시대 중앙아메리카 지협에서 민주주의와 평화를 증진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좌익 게릴라가 미국이 지원하는 엘살바도르와 과테말라 정부와 싸우고 있었고, 미국이 지원하는 콘트라(Contras)가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Sandinista)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으며, 군부로부터 정권을 막 탈환한 온두라스(Honduras)는 미군 기지로 이용되면서 곤경에 처해 있었고, 코스타리카의 다른 국경인 파나마(Panama)는 마누엘 노리에가(Manuel Noriega)의 군사 독재의 억압에 직면해 있었다. 아리아스의 지원으로 여러 무장 갈등은 10년 안에 종식되었다(과테말라 내전은 1996년에 최종적으로 종식됨).
그 후 아리아스는 중앙아메리카 지역의 더 높은 수준의 통합을 촉구하고 중앙아메리카 의회(Central American Parliament)(''Parlamento Centroamericano'')의 창설을 촉진했다. 현재 그의 행정부에서 아리아스는 코스타리카가 중앙아메리카 의회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아리아스는 또한 코스타리카의 교육 제도를 개정했다. 이와 관련된 가장 주목할 만한 조치는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과정의 말미에 표준화된 학업 능력 시험을 재도입한 것이다.
1986년 적극적인 영구 중립 및 비무장 선언을 발표한 오스카르 아리아스(Alberto Monge) 대통령의 뒤를 이어 국민해방당(PLN) 소속으로 대통령에 취임. 군대 폐지의 날(Día de la Abolición del Ejército, Military abolition day)을 선포(법안 #8115)
1990년 대통령직 사퇴.
2. 2. 2. 두 번째 임기 (2006-2010)
1969년 코스타리카 헌법 개정으로 전직 대통령의 재선을 금지하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아리아스는 코스타리카 대법원 헌법재판소인 살라 4(Sala IV)에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으나, 2000년 9월 그의 신청은 기각되었다. 2003년 아리아스 지지자들은 재선을 금지하는 1969년 헌법 개정 조항에 대한 위헌 심판을 청구했고, 2003년 4월 재판부는 중복되지 않는 한 재선을 금지하는 조항을 무효화했다.[5] 이 결정은 전 대통령 루이스 알베르토 몽헤에 의해 "국가 쿠데타" 또는 "쿠데타"로 비난받았다.[6][7]아리아스는 2004년 2006년 2월 총선에 다시 대통령으로 출마할 의사를 밝혔다. 당시 그는 투옥되거나 기소되거나 수사를 받고 있지 않은 유일한 생존 전직 대통령이었다. 수년 동안 민간 여론조사 기관과 여러 뉴스 매체에서 아리아스가 큰 차이로 승리할 것이라는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지만, 선거 초반에는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한 달 후인 3월 7일, 수동 재검표 후 공식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아리아스는 중도좌파 후보 오톤 솔리스를 18,169표(유효표의 1.2%) 차이로 누르고 1차 투표에서 대통령직을 차지하는 데 필요한 40%의 문턱을 간신히 넘었다. 그는 2006년 5월 8일 정오 국립경기장에서 취임 선서를 했다. 그는 2008년 9월 15일 연설에서 반대파의 비판으로 지쳐있다고 말했다.
2007년 6월 1일, 그는 코스타리카의 외교적 인정을 중화민국(대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전환하여 코스타리카를 그렇게 한 세계 167번째 국가로 만들었다. 이후 베이징의 외교적, 재정적 압력 하에, 그는 달라이 라마(동료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티베트에서 논란이 되는 폭동을 진압하는 베이징의 탄압 중에 예정되었던 방문을 무기한 연기하도록 유도했다.[8]
2009년 4월 18일,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열린 제5차 미주 정상회의에서 아리아스는 "우리는 잘못된 일을 해왔다"는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다른 라틴 아메리카 지도자들을 향해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지역과 비교한 개발 부족을 비난하고 실용주의와 군대보다 교육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할 것을 촉구했다.[9]
2009년, 온두라스 대법원은 온두라스 대통령 마누엘 셀라야가 헌법 및 법률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10][11] 이틀 후, 온두라스 국회(셀라야의 당이 128석 중 62석을 차지하여 다른 어떤 당보다 많은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셀라야의 해임을 결의했다.[12][13][14]
셀라야는 코스타리카로 망명했다. 온두라스 헌법에 따라 의회 의장인 로베르토 미첼레티가 대통령 계승 순위에 따라 임시 국가 원수가 되었다. 엘빈 에르네스토 산토스 부통령이 2008년 12월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해 사임했기 때문이다. 미첼레티의 임기는 2010년 1월 27일에 종료되었다.[15]
아리아스는 2009년 온두라스 헌법 위기에서 셀라야와 미첼레티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맡았다. 두 온두라스 대표는 여러 차례 아리아스와 만났지만 아직까지 어떤 합의에도 이르지 못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아리아스 자신은 처음에 코스타리카 헌법 재판소에 의해 헌법적 임기 제한으로 인해 추가 임기를 허용받지 못했지만, 온두라스와 달리 코스타리카 Sala IV 법원의 동의를 얻어 법적 수단을 통해 이를 뒤집었다. 온두라스에서는 2009년 11월 29일 새로운 선거가 계획되었다. 미첼레티 정부는 2009년 7월 2일 올해 대통령 선거를 앞당겨 치를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아리아스는 셀라야의 대통령 복귀를 촉구하는 7개 항의 합의안을 제시했다. 이는 임시 정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셀라야의 대표들은 아리아스의 제안을 "원칙적으로" 수용했지만, 미첼레티의 대표들은 셀라야의 온두라스 권력 복귀라는 핵심 사항에 반대했다.[16]
2009년 8월 11일, 아리아스는 2009년 신종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었다. 국가 원수로서는 처음이었다.[31] 2010년 5월 8일, 그의 임기는 만료되었다.
2. 3. 퇴임 이후
2009년 온두라스 대법원은 마누엘 셀라야 온두라스 대통령이 헌법 및 법률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10][11] 이틀 후, 온두라스 국회는 셀라야 대통령 해임을 결의했다.[12][13][14] 셀라야는 코스타리카로 망명했고, 온두라스 헌법에 따라 로베르토 미첼레티 국회 의장이 임시 국가 원수가 되었다.[15]아리아스는 2009년 온두라스 헌법 위기에서 셀라야와 미첼레티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맡았다.[16] 두 온두라스 대표는 여러 차례 아리아스와 만났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아리아스는 셀라야의 대통령 복귀를 촉구하는 7개 항의 합의안을 제시했으나, 임시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6] 셀라야의 대표들은 아리아스의 제안을 "원칙적으로" 수용했지만, 미첼레티의 대표들은 셀라야의 온두라스 권력 복귀라는 핵심 사항에 반대했다.[16]
2007년 8월, 아리아스는 건염으로 고통받았고, 2008년 4월에는 요추 부위의 근육통으로 일부 활동을 취소했다. 2008년 5월에는 성대에 악성이 아닌 낭종이 있다는 진단을 받고 한 달 동안 말하지 말라는 권고를 받았다.[17] 2009년 8월 11일에는 신종플루(H1N1)에 감염되었지만 회복되었다.[18]
3. 논란
아리아스의 일부 행동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 2004년, 같은 당 후보(안토니오 알바레스)가 토론을 제안하자 오스카르 아리아스는 "독수리는 높은 곳에 살며, 달팽이와 싸우려고 진흙 속으로 내려가는 것은 큰 실수다"라고 말했다.[19]
- 2010년, 두 번째 임기의 마지막 몇 주 동안 그는 여러 미완성 프로젝트의 리본 커팅식과 동판 제막식을 거행했다.
- 완공률이 75%에 불과한 새 국립경기장.[20]
-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새 대통령 집무실". 사실, 그 땅은 아직 매각 중이며, 의회는 토지를 매입하거나 빈터에 건물을 짓기 위한 예산을 아직 배정하지 않았다.[21]
- 공사가 82%밖에 완료되지 않은 새 후안 산타마리아 국제공항 시설.[22]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논란은 계속되었다. 에스카수에서 칼데라까지 스페인 회사인 오토피스타스 델 솔이 건설한 도로는 높은 통행료와 위험한 도로(추가적인 산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많은 보수 공사가 필요했다)로 수년간 많은 비판을 받았다. 오스카르 아리아스는 또한 지역 생물다양성을 훼손할 가능성이 있는 대규모 광산 개발을 위해 캐나다 기업을 초청한 것에 대해 비난을 받았다. 라우라 친칠라 정부 시절에 그들의 허가는 취소되었는데, 이는 아리아스가 당시 대통령으로 인기가 많았던 라우라 친칠라를 갑자기 비판한 후 아리아스와 친칠라 사이의 적대감을 보여주는 듯했다.
2017년 코스타리카 검찰은 크루시타스 사건(Crucitas case)으로 아리아스를 기소했다. 이 사건은 당시 환경부 장관 로베르토 도블레스(Roberto Dobles)와 대통령 아리아스가 2008년 니카라과 국경 근처 보호 구역인 크루시타스(Crucitas)에 대한 캐나다 회사 인피니토 골드(Infinito Gold)의 금광 개발 통제권 이양을 선포하는 법령에 서명한 사건이다. 검찰은 이를 "국가 이익"으로 선언했지만, 보호 구역은 어떤 종류의 개발에도 허용될 수 없으므로 불법이라고 주장했다.[23] 도블레스는 이전에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아리아스는 아리아스와 가까운 것으로 종종 비난받는 전임 검찰총장 호르헤 차바리아(Jorge Chavarría)에 의해 함께 기소되지 않았다.[24] 새로운 검찰총장 에밀리아 나바스(Emilia Navas)는 사건을 재개하여 아리아스를 기소했다.[24]
또한 2019년 정신과 의사이자 반핵 운동가인 알렉산드라 아르세 본 헤롤드(Alexandra Arce von Herold)는 공공 기관에 아리아스를 강간 혐의로 고발했다. 그녀의 주장 이후, 아리아스를 성희롱 및 위법 행위로 고발하는 세 명의 여성이 더 나타났다.[23][25] 아리아스는 이러한 혐의를 부인했다.[23] 2020년 12월, 아리아스에 대한 모든 성희롱 혐의는 기각되었다.[26] 1년 이상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증거가 없어 검찰이 사건을 기각했다. 두 명의 고소인의 요청에 따라 소송 취소 및 그에 따른 기각이 이루어졌다.[27] 파바스 형사 법원의 나탈리아 로드리게스 솔리스 판사가 최종 기각을 명령했다.[28]
"크루시타스" 사건과 관련하여, 2019년 10월 전 대통령은 사법 결정에 따라 해당 사건에서 완전히 벗어났다.[29]
2019년 2월, 두 명의 여성으로부터 성희롱(セクハラ) 행위로 고발당했다.[33] 한 명은 정신과 의사이자 반핵 운동가 여성으로, 군축 관련 인터뷰 도중 뒤에서 가슴을 만지고 손을 넣었다고 주장했고, 다른 한 명은 국제인권단체(NGO)인 휴먼 라이츠 워치(ヒューマン・ライツ・ウォッチ) 직원 에마 다일리로, 대통령 재임 시절이었던 1990년 면담 당시 갑자기 가슴을 만지면서 "브래지어를 안 했네"라고 말하는 등의 행위를 했다고 주장했다.[33] 이 두 사람 외에도 전 미스 코스타리카가 가슴을 만지고 키스를 당했다고 고소하는 등 여러 여성이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34] 아리아스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33]
3. 1. 신자유주의 정책 논란
아리아스의 일부 행동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2004년, 같은 당 후보 안토니오 알바레스가 토론을 제안하자 "독수리는 높은 곳에 살며, 달팽이와 싸우려고 진흙 속으로 내려가는 것은 큰 실수다"라고 말했다.[19] 2010년 두 번째 임기 말에는 완공률이 75%에 불과한 새 국립경기장,[20] 아직 부지 매각 중이며 의회 예산도 배정되지 않은 "새 대통령 집무실",[21] 공사가 82% 완료된 새 후안 산타마리아 국제공항 시설[22] 등 여러 미완성 프로젝트의 리본 커팅식과 동판 제막식을 거행했다.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에스카수에서 칼데라까지 스페인 회사인 오토피스타스 델 솔이 건설한 도로는 높은 통행료와 잦은 보수 공사로 인해 비판받았다. 아리아스는 지역 생물다양성을 훼손할 수 있는 대규모 광산 개발을 위해 캐나다 기업을 초청한 것에 대해서도 비난받았다. 친칠라 미란다 정부 시절에 해당 허가는 취소되었는데, 이는 아리아스가 라우라 친칠라 미란다를 비판한 후 둘 사이의 적대감을 보여주는 듯했다.
3. 2. 성추문 의혹
2019년 정신과 의사이자 반핵 운동가인 알렉산드라 아르세 본 헤롤드(Alexandra Arce von Herold)는 아리아스를 강간 혐의로 고발했다.[23] 그녀의 주장 이후, 아리아스를 성희롱 및 위법 행위로 고발하는 세 명의 여성이 더 나타났다.[23][25] 아리아스는 이러한 혐의를 부인했다.[23][33]2019년 2월에는 두 명의 여성으로부터 성희롱(セクハラ) 행위로 고발당했다.[33] 한 명은 군축 관련 인터뷰 도중 뒤에서 가슴을 만지고 손을 넣었다고 주장했고, 다른 한 명은 국제인권단체(NGO)인 휴먼 라이츠 워치(ヒューマン・ライツ・ウォッチ) 직원 에마 다일리로, 1990년 면담 당시 갑자기 가슴을 만지면서 "브래지어를 안 했네"라고 말하는 등의 행위를 했다고 주장했다.[33] 전 미스 코스타리카도 가슴을 만지고 키스를 당했다고 고소하는 등 여러 여성이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34]
2020년 12월, 아리아스에 대한 모든 성희롱 혐의는 기각되었다.[26] 1년 이상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증거가 없어 검찰이 사건을 기각했고, 두 명의 고소인의 요청에 따라 소송 취소 및 그에 따른 기각이 이루어졌다.[27] 파바스 형사 법원의 나탈리아 로드리게스 솔리스 판사가 최종 기각을 명령했다.[28]
3. 3. 크루시타스 광산 개발 논란
오스카르 아리아스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여러 논란에 휩싸였다.[19] 에스카수에서 칼데라까지 스페인 회사인 오토피스타스 델 솔이 건설한 도로는 높은 통행료와 잦은 보수 공사가 필요한 위험한 도로 상태로 인해 수년간 많은 비판을 받았다.[19] 또한 지역 생물 다양성을 훼손할 수 있는 대규모 광산 개발을 위해 캐나다 기업을 초청한 것에 대해서도 비난을 받았다.[19] 이 광산 개발 허가는 라우라 친칠라 미란다 정부 시절 취소되었는데, 이는 아리아스가 친칠라를 비판한 후 두 사람 사이에 적대감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19]4. 대한민국과의 관계
4. 1. 더불어민주당과의 관계
5. 평가
6. 수상 내역
오스카르 아리아스는 하버드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 다트머스 대학교, 오벌린 대학교, 웨이크 포레스트 대학교, 이타카 대학교, 세인트루이스 워싱턴 대학교 등 50개 이상의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수상 경력은 다음과 같다.
- 마틴 루터 킹 주니어 평화상
- 필라델피아 자유 훈장
- 잭슨 럴스턴 상
- 아스투리아스 공주상
- 알베르트 슈바이처 인도주의상
- 아메리카스 상
7. 저서
오스카르 아리아스는 정치, 사회, 경제,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폭넓은 저술 활동을 펼쳤다. 그의 초기 저작들은 코스타리카 정치 현실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담고 있다. 1970년에 출간된 ''코스타리카의 압력 단체''(Grupos de presión en Costa Rica)와 1976년 작 ''코스타리카를 지배하는 자는 누구인가''(Quién gobierna en Costa Rica)는 코스타리카 사회의 권력 구조와 정치 과정을 분석한다. 1977년에는 ''민주주의, 독립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 사회''(Democracia, independencia y sociedad latinoamericana)를 통해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 사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코스타리카의 발전 방향에 대한 고민을 담은 저작들을 발표했다. 1978년 ''코스타리카 발전을 위한 길''(Los caminos para el desarrollo de Costa Rica)과 1979년 ''코스타리카 발전을 위한 새로운 방향''(Nuevos rumbos para el desarrollo costarricense)이 대표적이다. 1984년에는 ''코스타리카를 지배하는 자는 누구인가?''와 ''코스타리카 발전을 위한 새로운 방향''을 재출간했다.
대통령 재임 기간(1986-1990, 2006-2010)과 그 이후에는 평화와 민주주의, 교육, 군축 등의 주제에 집중했다. 1989년 ''평화의 길''(El camino de la paz), 1990년 ''평화의 지평''(Horizontes de Paz)과 ''평화의 씨앗''(La semilla de la paz)은 중앙아메리카 평화 정착을 위한 그의 노력을 보여준다. 1994년 ''교육의 새로운 차원''(Nuevas dimensiones de la educación)에서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2000년대 이후에도 활발한 저술 활동을 이어갔다. 2005년 ''함께 길을 가자''(Hagamos juntos el camino), 2007년 ''계속 전진하자''(Sigamos Avanzando), 2012년 ''촛불, 키, 나침반을 가지고''(Con velas, timón y brújula) 등을 출간했다. 2023년에는 ''아이디어의 힘''(The Power of ideas), 2024년에는 ''나의 기억의 페이지들''(Pages of my memory)를 출간하여 최근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아리아스는 또한 여러 신문 기고문과 연설문을 남겼다. "사랑을 위한 정치"(Por amor a la política), "니카라과 무기 유입에 관한 오스카르 아리아스의 서한"(Carta de Oscar Arias sobre flujo de armas a Nicaragua), "평화 계획 서명 30주년"(A 30 años de la firma del Plan de Paz) 등의 기고문이 있다. 그의 연설문은 Viaf.org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과거 코스타리카의 발전 특징과 미래 전망 |
촛불, 키, 나침반을 가지고 |
중앙아메리카의 비무장화, 탈군사화 및 민주화 |
민주주의, 독립 및 라틴 아메리카 사회 |
평화의 길 |
국가와 인권 교육: 강사, 개강 강연, 1991년 6월 12일, 과테말라 산 카를로스 대학교 |
노벨상: 역사, 분석, 수상자 |
오스카르 아리아스 산체스와의 인터뷰 |
에스키풀라스 협정 10년 후: 중앙아메리카의 미래는? |
전략 및 글로벌 계획: 예비 버전 |
중앙아메리카를 위한 평화, 1987: |
녹색 시장: 지속 가능한 발전 경제학 |
함께 길을 만들자: 연설, 기사 및 에세이 |
평화의 지평: 중앙아메리카 평화 과정에 대한 코스타리카의 기여 |
국가와 카라소 오디오 정부의 위험한 권력 집중 |
평화: 승리하는 대의 |
평화에는 국경이 없다; [오직 평화만이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다]: 1987년 노벨 평화상 수상을 기념하여 1987년 12월 10일과 11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행한 연설 |
평화의 씨앗: 연설 모음 |
무기 거래 조약: 기원, 분석, 이해 관계, 기존 재래식 무기 국제 이전 규제에 관한 최초의 법적 수단의 전망 |
리더십과 글로벌 거버넌스 |
라틴 아메리카에서 본 21세기의 도전 과제 |
새로운 교육의 차원, 1994: |
21세기 전망: 전략적 전망을 통해 미래를 건설하기 위한 거대 추세와 새로운 세계화 이해하기 |
개발 계획 및 행정을 위한 코스타리카의 지역화 |
에스키풀라스 협정 10년 후: 미래를 향하여: ACUNS 10차 연례 회의에서 발표 = 에스키풀라스 협정 10년 후: 미래를 향하여: ACUNS 10차 연례 총회에서 발표 |
무기 시장: 1995년 폴 G. 호프만 강연 |
평화를 위한 투쟁 |
바르셀로나, 2000년 12월 15일 평화 문화를 위한 평화의 목소리: 군축을 가능하게 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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